요즘 한국영화의 전성기 속에서 ‘설국열차’는 상한가를 치고 있다. 만화작가다운 기발한 착상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도입부는 내레이션으로 빠르게 진행된다. 대기권의 CO2 농도 조절을 위한 기후협약으로 인류가 무리한 약을 살포 후 지구는 신빙하기에 도래한다.
기차는 미래판 살아남은 사람들의 ‘노아의 방주’로 폐쇄된 축소판 사회요, 국가다(그러나 구약의 것과 달리 악의와 음모가 꿈틀대는 방주다). 그 자체로 몰락한 자본주의 체제를 상징한다. 철도왕의 뚝심으로 5대양 6대주가 연결되어 무한동력으로 17년 동안 질주하고 있다. 겉보기에는 무한동력이지만 실상은 강제 착취 동원된 아이들이 엔진부품으로 이용되는 장면도 나온다.
기차는 마지막 남은 인간들의 체제유지의 도구이다. 빈민(대중)이 타고 있는 꼬리칸은 영국산업혁명 당시의 증기기관차이며 앞칸으로 갈수록 신분상승을 의미한다(인도 여행 중 타보았던 열차와 흡사하다. 실제로 요금에 따라 식사와 침실이 천지차이이며, 극빈자 칸의 유리창은 동물 수송칸처럼 쇠창살이 있었다.
역에는 거지와 구걸인들이 득실거린다. 식사 때면 미안한 생각이 들 정도다). 다만 인도에서는 경찰이 역에서만 보이는데 여기서는 열차 내부를 군인이 장악한다. 급기야 꼬리칸 인민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대량살육으로 앞칸으로 진출하고자 하는 과정이 줄거리를 이룬다.
꼬리칸은 닭장처럼 켜켜이 쌓은듯한 침대 구조로 굉음을 울리며, 거칠고 시커먼 배경이다. 먹어야 하는 일이 정치이자, 인격이다. 총을 든 살벌한 분위기의 감시 속에서 단백질 바를 분배하는 장면은 최소한의 먹거리로 사회 대중을 조정하는 퇴행한 전체주의 체제를 연상시킨다(단백질바는 비밀리에 바퀴벌레로 대량생산한다).
앞칸으로 나아갈수록 젖과 꿀이 흐르는 안온하고 평화로운 크루즈 분위기로 돌변한다. 고급 레스토랑, 미용실, 네일숍, 스팀 사우나를 즐기는 여성들이 스냅으로 휙 스쳐가는데 그 중에는 유니트체어에서 치과진료를 하는 장면이 포함돼 당연히 필자의 눈길을 끌었다.
치과는 고급 미래문명에도 꼭 동반할 품목으로 선정되었다. 치과의사 입장에서 보면, 하필 그런 상황에서 부르조아 계급만을 위한 장치로 묘사한 점은 허술하고 씁쓸하다. 감독의 상상력 부족이지만 그러려면 치아 줄기세포 이식수술 등의 최첨단 시술 장면을 잠깐 선보이는 것이 실감났을 것이다.
치과 진료가 거창한 생명구제보다는 삶의 질 측면에 필수적이란 정곡을 찌른 것은 맞다. 하지만 현실에 비춰보면 괴리감이 느껴진다. 건보공단이나 심평원의 공무원으로 전락한 듯한 치과의사는 이미 일반대중이 쉽게 접근할 수 있다. 오히려 영화에서 실제보다 높게 보고 오버하고 있다는 냉소감이 생긴다.
영화에서는 흰색 가운을 입고 진료에 열중하고 있는 품격있는 치과의사와 진료스탭을 비춰주지만, 현실에서는 전문직에 대한 대접과 예우는커녕 진료에 대한 이의제기가 점점 드세지는 환자와 각종 규제로 육체와 감정노동 강도만 증가할 뿐이다. 치과의사를 보는 환자의 시선이 상승돼 우리 스스로 보는 시선과 불일치됨을 느낀다.
그러나 긍정적으로 보면, 그 세상의 수많은 직종 중에서 치과의사를 선택한 감독의 통찰은 고맙기만 하다. 사실 18세기 중반만 해도 조직과 과학의 기반이 빈약한 주변 기술인에 불과했던 설움을 지나 현재 최고의 직업으로 등극한 것은 선현들의 치열한 탐구적 헌신 덕분이었을 것이다.
미국의 Gies, 영국의 Hunter, 프랑스의 Fauchard는 우리의 평생 은인이다. 후대의 아류 영화에서 치과의사가 어떤 이미지로 그려질 것인가가 궁금해지는데, 이는 현시점에서 우리의 역할 재정립(전문치의인가, 수퍼 GP인가)에 달려있다고 보여 진지해지기도 때론 숙연해지기도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