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만에 다시 읽은 러셀의 ‘행복의 정복’은 예전에 읽을 때와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예전에 읽을 때는 그냥 지나쳤던 글귀가 이제 필자가 경험을 해보니 글자마다, 단어마다 주옥같이 가슴에 스며들었다. ‘한 쌍의 부부가 평균 두 명 이상의 자녀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들은 자녀를 낳고 싶다고 원할 만큼 충분히 삶을 즐기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라는 구절을 읽으면서 매우 놀랐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발생하고 있는 일을 이미 80년 전인 1940년에 기술한 것이 놀라웠고, 그 당시에 이미 선진국에서 그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던 사실에 두 번 놀랐다. ‘성공하기 위해서 다른 요소들을 모두 희생한다면, 그 성공은 너무 비싼 대가를 치르게 된다.’ 지금 우리나라 교육이 처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지적하고 있다.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하여 인성교육은 사라졌고, 오로지 점수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점수에 매진한 결과가 현실에서 벌어지는 사건 사고의 근원적인 원인인 것을 지적하고 있다. PC방 살인사건, 부산 결별 여자친구 일가족 살인사건, 보험금 노린 부모 살인사건, 인천 초등학생 유괴 살인사건 등 지금 우리 사회에서 발생하고 있는 초강력 범죄들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모임에서 필자와 비슷한 연배의 어떤 분이 암 투병을 극복한 일을 이야기하면서 본인은 아직도 뭐든 할 수 있는 자신이 있는데 병이 들었다고 말했다. 이야기를 듣던 필자는 한 가지 질문을 했다. “지금도 뭐든지 할 수 있다고 정말 생각하시는지요?” 자랑스러운 듯한 답변을 들었다. 이에 필자는 “그러시면 아마도 요즘 가까운 사람들이 매우 힘들어할 것입니다”라고 답했다. 이에 아내 되시는 분이 “요즘 자녀들과 사이가 나빠져서 아들을 자력으로 고생해보라고 내보낸 일이 있었는데 용하시다”는 말을 들었다. 필자가 예언가도 아니고 그런 것을 알 수 없지만 유추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이순 나이에 아직도 자신감이 충만하다는 것은 살면서 큰 위기를 겪지 않은 것을 의미한다. 물론 본인 입장에서는 다양한 위기가 있었고 그것을 잘 대처하는 능력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필자 연배 사람들이라면 대부분 노력하면 가능한 기회가 많았기 때문이다. 개발도상국 시절에 모든 분야에서 일손이 부족했고 어떤 일이든지 국내에서는 처음 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치열한 경쟁자도 없었다. 결국 과도한 욕심에 사기를 당하거나 무리한 투자를 하지 않는 이상 망하기 어려운 환경이었다. 그것을 오롯이 자
지난주에 일본 센다이에 다녀왔다. 일본 유학을 마치고 정확히 20년이 지났다. 센다이 모습은 예전과 같은 듯 달랐다. 20년이 지났지만 유학 시절 다니던 길이나 건물들도 별로 많이 변하지 않았다. 다만 도로를 달리는 차들이 다르게 느껴졌다. 1998년 당시는 자동차 절반 정도가 외국차였다. 벤츠나 BMW 등 외국 고급차가 흔했다면 지금은 대부분 차들이 일산으로 바뀌었고 외국 승용차는 간간히 보였다. 특히 절반 이상 뒤에 짐을 많이 실을 수 있는 개량형 SUV가 많았다. 20년 사이에 눈에 띄는 변화였다. 늘 앉았던 길가 벤치에서 이유를 생각해보았다. 그 많았던 외국 고급승용차들이 왜 사라진 것일까? 그 동안 어떤 변화가 있었던 것일까? 우선 외제 고급승용차를 타는 이유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1998년 당시에도 토요타는 좋은 차였다. 캐나다에서 절반 정도가 일제차였다. 좋은 차를 타기 위해서라는 이유가 성립되지 않는다. 간단하게 명품을 선호하던 것과 맥락이 같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자동차는 조금 다르다. 이미 일제차는 내구성이나 성능에서 월등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50%가 외제차였던 것은 아마도 마음 속 내면에 남에게 좀 있어 보이고자 하는 마음이라
“지금 행복하십니까?”라는 질문에 명확하게 “네”라고 답할 수 있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그럼 “지금 치과의사로서 행복하십니까?”라는 질문에는 과연 치과의사들은 몇 명이나 “네”라고 답변할 수 있을까? 많은 이들이 답변을 주저할 것이다. 그 이유는 몇 가지가 있다. 우선 대부분 행복에 대해 자기 스스로 정리해보지 않았다. 자기에 맞는 맞춤형 행복을 생각해보지도 않았다.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었거나 아니면 사회 통념에 맞춰 돈을 많이 벌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을 가능성도 크다. 그래서 보통 행복의 조건인 돈을 벌기위해 모든 시간과 노력을 올인하고 원하는 대로 되지 않으면 불행을 느낀다. 하지만 행복은 자신을 돌아보고 거기에 맞는 맞춤형 행복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자신이 생각하는 행복에 대한 깊은 통찰이 필요하다. 그 후에 자신이 원하는 행복과 실현가능성의 차이를 고려해 행복의 높이와 종류를 결정해야 한다. 행복은 1930년에 러셀이 쓴 <행복의 정복 Conquest of Happiness>에 잘 정리되어 있다. 그는 행복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약속된 미래가 아니고 노력해서 정복해야할 대상이라고 하였다. 책에서 ‘
유명 포털사이트 뉴스를 검색하다가 사회면에 치과원장이 스스로 세상을 여읜 기사를 접하고 놀라고 안타까운 마음에 한동안 생각이 멈추었다. 지면이나마 고인의 명복과 유족들에게 애도의 뜻을 전한다. 기사에 의하면 52세 원장님이었다. 비보에 마음이 아팠지만 작고하신 원장님보다는 선납한 환자들의 피해 구제에 포커싱되어 있는 듯한 기사가 마음을 더욱 무겁게 하였다. 물론 환자를 생각하는 기자의 입장은 이해가 되지만 필자는 52세에 스스로 생을 정리해야만 했던 상황에 더욱 가슴이 아프다. 게다가 유족들이 가장을 잃은 슬픔보다 치료비를 선납한 환자들에게 시달릴 것이 더욱 안타깝다. 조금만 생각을 바꾸면 다른 선택도 많았을 것을… 전부 내려놓으면 되는 것을… 그냥 산에서 자연인으로 살 수도 있는 것을… 한 생각 바꾸면 시간이 해결해주는 것을…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요즘 같은 불경기에 병원운영에 힘든 원장님이 어디 한 둘이겠는가. 동네치과는 동네치과대로, 대형치과는 대형치과대로 경영이 힘든 것이 요즘 사정이다. 동네치과는 한자리에서 아무리 오랫 동안 병원을 운영하고 있어도 주민들이 잘 모른다. 주민들이 자주 바뀌기 때문이다. 2010년 이후부터는 환자들이 대부분 SNS를
‘비혼식’이라는 단어는 사전에 없는 말이다. 그런데 이 용어를 젊은 세대는 다 알고 나이든 세대는 거의 모른다. 필자가 나이를 직접 묻지 않고 간접적으로 확인하는 방법으로 어떤 특정 단어를 알고 있는지 여부를 물어본다. 예를 들어 캔디를 아는 세대, 황금박쥐를 아는 세대, 세일러문을 아는 세대가 다르다. 또 패션 스타일을 보아도 세대구분이 된다. 선글라스를 머리띠로 사용하면 정윤희, 유지인 세대이다. 남자가 굵은 목도리를 하면 겨울연가 세대이고, 여자가 하면 도깨비 세대이다. 영화를 보아도 구분이 된다. 남녀가 앉아서 대화를 하면 2010년 이전 영화이고 스마트폰을 보고 있으면 그 이후 영화다. 사람들은 자신이 과거에 경험한 일들이 지금도 반복될 것이라 생각하며 자신이 옳다는 기준에서 외부를 바라본다. 새롭게 리뉴얼하지 않으면 고정된 생각과 관념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비혼식’이란 단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용어를 사용하는 세대를 이해해야만 한다. 그럼 비혼식이란 단어를 모르는 기성세대를 위하여(적어도 40대는 50% 정도 모를 것이고, 50대 이상은 90% 모를 것이고, 60대 이상은 들어도 이해를 못할 것이고, 70대 이상은 알면 말세라 할 것이다) 잠
요즘 의료계는 두 개의 초유 사건으로 충격을 받았다. 치과계에는 투명치과 원장 구속영장 청구와 그 전 직원 6명 입건이라는 사태가 발생하였고, 의과계에는 의료기기 영업사원 대리수술 뇌사사건이 발생했다. 이 두 사건은 의료인으로서 최소한의 양심과 윤리가 없었다는 면에서 일치한다. 돈벌이라면 무엇이든 다한다는 나쁜 사회풍조를 의료인들이 행했다는 사실에 분노를 넘어 슬프다. 더욱 슬픈 것은 그 의사의 답변이었다. 왜 대리수술을 시켰냐는 질문에 자신은 외래 진료가 바빠서 어쩔 수 없이 시켰다고 변명했다. 이미 그에게는 외래환자가 많아지면 의사를 더 고용하거나 환자 수를 조정해야 한다는 가장 기본적인 생각이 없었다. 다른 의사를 고용하지 않은 것은 다른 의사가 진료를 잘하지 못할까 두려웠던 것이 아니라는 점은 확실하다. 영업사원에게 대리수술을 시켰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돈을 위해 양심에 영혼까지 팔아버렸다. 두 번째 공통점은 원장과 그 외의 사람들이 범죄에 가담한 사실이다. 투명치과사건에서는 전 직원 6명이 입건되었다. 무면허 대리수술 사건에서는 영업사원이 가담되었다. 물론 두 사건에서 연관자들이 가담한 사유는 다를 것이다. 치과 전 직원들은 아마도 인센티브라는 유
9월16일 대한심신치의학회의 창립총회 소식에 축하를 전한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치과계 환경에서 의료 종사자로 사는 것이 쉽지 않다. 치과계뿐만 아니라 사회전반에 걸쳐 상식을 넘어선 일반적이지 않은 메시지들이 들려오고 있다. 한의원에서 봉침을 맞고 쇼크에 빠진 환자를 같은 층에 있는 가정의학과 원장이 응급처치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환자가 사망한 일이 있었다. 이에 유가족들은 도움을 주러왔던 가정의학과 원장까지 처치가 늦었다는 이유로 소송을 하였다. 이 사건은 필자에게 두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응급처치를 해준 의사를 소송하는 유가족이 상식을 벗어난 것인가? 아니면 지금 우리 사회가 일단 소송하는 것이 상식의 선으로 변해 있는 것인가? 사회전반에 걸쳐 과거와 비교해 상식을 재는 잣대가 바뀐 것만은 확실하다. 피해자와 가해자의 생각이 다른 것은 당연하지만 사회에 통념상 적용되는 상식을 넘어서는 사건이 요즘 많이 보인다. 이런 사회 환경에서 환자를 대하는 의료종사자들은 두 가지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첫째, 상식의 잣대가 변해있는 환자는 의료행위나 질환을 판단함에 있어서 의료인을 믿기보다는 자신의 생각을 주장하거나 혹은 스스로 새로운 형태의 질환을 만들어내는 경우
울산 대왕암을 다녀왔다. 울산여자치과의사회 강연을 마치고 다음날 아침 호우주의보에도 불구하고 도착한 대왕암의 첫 모습은 평범하였다. 너무도 평범한 모습은 기도드리는 사람들의 징소리조차 무색하게 하였다. 돌아오는 기차에서 대왕암을 검색하면서 대왕암의 평범함은 새롭게 다가왔다. 대왕암에는 두 가지 이야기가 있다. 유골을 뿌린 곳이라는 이야기와 수중릉이라는 이야기다. 삼국사기에는 산골처(유골이 뿌려진 곳)로 되어 있다. 3국을 통합한 문무대왕은 자신의 화려한 능묘를 만드는 일에 얼마나 많은 백성이 수고를 할지를 알고 그는 용이 되어 왜구의 침입을 막겠다는 명분으로 화장할 것을 원하여 산골한 곳이 대왕암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통일을 완성한 위대한 왕의 업적보다는 죽어서도 자신의 무덤을 만들고 관리하는 데 고생하는 백성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을 보인 진정으로 위대한 왕이었다. 두 번째 이야기인 수중릉에 대한 것은 도굴을 막기 위하여 삼국사기에 화장하여 산골한 것처럼 기록한 것이지 실제로는 무덤이 존재한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필자의 생각에는 산골처에 더 믿음이 간다. 대왕암에서 평범함과 고즈넉함이 수 천 년 넘어 조금도 변함없이 그대로 전해지고 있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
주말에 한 영화를 보았다. 영화 속 장남은 아버지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했고 형제 중에서 차별을 받았다는 생각으로 가출하였다. 아버지 장례식에 와서 유품으로 남은 편지를 보고서야 비로소 아버지가 자신을 미워하지 않았고 사랑하였다는 것을 아는 내용이었다. 아버지는 은연중에 본인이 겪은 장남의 무게가 무거워서 큰아들을 좀 더 강하게 키우고 싶었던 것을 아들은 차별로 인식하였다. 우리 속담에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는 속담이 있는 것을 보면 자식들이 부모로부터 차별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영화에서처럼 장남이나 장녀가 차별을 받았다고 생각하기 쉽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자녀 입장과 부모 입장으로 나눌 수 있다. 부모가 동등하게 아이들을 대했다고 하더라도 아이들은 과거에 자신들이 겪은 것은 모두 잊어버리고 몇 가지 이벤트성 왜곡된 기억을 지니게 된다. 그래서 동생에게 보이는 부모 모습은 늘 생소하고 자신은 겪지 못한 사건으로 인식하여 부모가 자신을 미워하고 차별했다고 생각한다.부모 입장을 보면 우선 첫아이에서 경험을 해봐서 두 번째부터는 시행착오가 적어진다. 더불어 첫아이에서 보이는 기대감이나 관심도가 상대적
요즘 이 맹렬한 폭염에 진료실 에어컨에 문제가 있어 고생 중이다. 옆 상가에 새로 상점이 들어와 인테리어를 하면서 우리 에어컨 실외기 위치를 옮긴다고 해 허락해주었다. 요즘은 건물 외관을 위해 실외기를 옥상에 설치한다는 관리소장 말을 듣고 이참에 실외기를 옥상에 올리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옥상에 실외기를 옮기고 문제가 발생했다. 첫날에는 찬바람이 나왔으나 며칠 시간이 지나면서 더운 바람이 나왔다. 아마도 연결한 접속 부분에 문제가 발생하며 냉각 가스가 모두 빠져 나간듯했다. 인테리어 사장이 와서 확인하고 고쳐주기로 했다. 그러나 시행업자로부터 다음 주에 고쳐주겠다는 말만 벌써 두 번째 들었다. 필자는 옛날 사람이라서 사람을 믿지 않기 때문에 통상 2~3일간 지켜보며 문제 발생여부를 확인하고 공사비용을 지불했다. 젊은 인테리어 사장이 열심히 하는 모습이 좋아보였고 시행하는 사람들도 폭염에 일하는 모습이 마음에 걸려 젊은 사람들은 우리 나이든 사람들과는 다를 것을 믿으면서 비용 이야기를 듣고 바로 송금해주었다. 그런데 오전에 송금하고 문제가 오후부터 발생했다. 오후부터 더운 바람이 나오기 시작했다. 인테리어 사장에게 전화를 하니 시공을 하는 사람이 일정이 있어
작년 여름에 분지하고 분갈이한 고목나무가 올해는 폭염에 조금도 자라지 않고 있다. 때맞춰 물과 거름을 주었지만 평소라면 한 여름에 몇 십장의 잎사귀를 키우던 것에 반해 올해는 조그만 변화가 없다. 식물이 한해는 길이 성장을 하고, 다음 해는 내실을 다지며 폭 성장을 한다는 말을 실감하며 자연의 법칙에 감탄한다. 집에서 화초를 많이 기르는 것은 아니지만 이번 폭염을 견디지 못하고 잎이 모두 말라버린 화분도 생겼다. 폭염에 열대야가 지속되고 에어컨을 계속 쐬니 냉방병 증세마저 나온다. 식욕도 떨어지고 무기력해진다. 자연의 조그만 변화가 인체에 미치는 영향을 몸소 체험을 했다. 하지만 오늘 입추가 되었으니 심한 폭염도 점차 사그라들 것이다. 자연의 법칙이다. 지난주에 여름휴가로 목포, 강진, 영남, 해남을 돌아보았다. 30년 전 학창시절에 보았던 목포역 광장은 주차장으로 변하였고 신도시 개발로 멋진 다리를 보았지만 필자가 알던 옛 모습은 이젠 사진과 기억 속에만 남아있음을 알았다. 30년이란 시간이 지나면 많이 변하는 것이 당연하건만 우리들 기억은 늘 변하지 않고 과거 속에 갇혀 있다. 건물만 아니라 사람도 세월이 지나면 몸과 생각이 많이 변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퇴근길에 신호정지선에 서있었다. 빨간 신호등으로 바뀌었지만 출발할 수 없었다. 스마트폰을 보면서 걷고 있던 20대 여성이 신호가 바뀐 것을 모르고 천천히 걷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주 목격하는 일이니 신기한 일도 아니다. 지하철을 타면 10명에서 8명은 스마트폰을 보고 있다. 그 중에 안 보는 2명은 대부분 노인인 경우다. 필자도 마찬가지이지만 가급적이면 이동 중에는 안 보려고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타당한 이유도 있다. 요즘처럼 노출이 심한 때에 눈길 한 번 잘못주거나 혼잡한 지하철에서 본의 아니게 잘못하여 신체적 접촉이라도 발생하면 양손에 무엇인가라도 들고 있어야만 성추행범으로 몰리지 않기 때문이란 말이 설득력이 있다. 필자도 오르는 방향의 에스컬레이터를 탈 때면 스마트폰을 보거나 혹은 90도 옆으로 서서 위가 보이지 않는 벽면을 본다. 의도치 않게 간혹 민망한 광경을 목격하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동 중에 스마트폰을 보는 것이 의미가 있어 보일 수도 있으나 다른 측면에서도 생각해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사회가 요즘처럼 분노조절이 되지 않아 문제가 된 것은 근래의 일이다. 필자의 기억으로는 스마트폰이
상악 소구치 하나가 왜소치보다는 크고 일반 크기보다는 조금 작은 환자가 있었다. 교정 마무리 단계에서 작은 소구치 주변에 공간이 약간 생길 것이니 보철치료를 받으라고 이야기를 했는데, 얼마 후 부모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치료 전에 미리 이야기를 듣지 못한 것에 대한 책임을 묻는 내용이었다. 전화를 받는 동안 다양한 생각이 들었다. 전문가라고 한들 과연 어디까지 예측하여야 할 것인가. 법에서 정한 환자의 알권리에 대한 설명의 의무는 과연 어디까지일까. 국민 정서법은 또 어디까지일까. “모른다. 이해하지 못했다. 들은 바 없다면 끝”이라는 시쳇말처럼 정말 끝인가. 대단한 의료사고도 아니지만 은근히 신경이 쓰여 차분히 마음을 들여다보니 억울함과 약오름이 자리하고 있었다. 치아가 작아서 생긴 일인 것을 미리 말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비난의 대상이 된 것이 억울했다. 의사생활 30년에 분쟁의 수순을 다 밟으면서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이 시간낭비라는 것을 머리보다 몸이 더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젊은 혈기라면 끝까지 따지겠지만 그냥 타협할 것을 알기 때문에 약이 오른 마음이 있는 것이다. ‘물에 빠진 사람 건져냈더니 보따리 내놓으라 한다’는 속담과도 같은 일을 수없이
어느 강연장에서 학부모로부터 “요즘 중학생이 된 아이들과 점점 멀어지는 듯한데 어쩌면 좋을까요?”라는 질문을 받았다. 이에 필자는 “먼저 묻지 말고, 질문을 받은 것에만 답변하면 됩니다. 단, 받은 질문에 대해서는 열심히 진지하게 들어주고, 말을 할 때는 연인에게 대하듯이 웃으면서 입꼬리를 올리시고 부정적 단어를 사용하지 말고 모든 대화의 끝은 무조건 긍정적으로 끝내야 합니다. 만약 그렇게 할 자신이 없으면 대화를 하지 말고 그냥 TV를 보는 것이 더 바람직합니다. 엄마의 모든 충고는 오로지 잔소리일 뿐으로 아이 귓속에 들어가지 않습니다”라고 답했다. 사춘기 청소년과 부모 간에는 반드시 문제가 발생하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아이들이 지닌 문제는 급격하게 변하는 신체와 뇌의 변화이다. 12세부터 전두엽이 발달하기 시작하는데, 전두엽이 덜 발달했을 때는 감정과 충동을 지배하는 편도체의 지배를 더 많이 받는다. 충고를 전두엽으로 들으면 조언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편도체로 들으면 잔소리로 판단한다. 전두엽 미숙으로 편도체를 사용하는 아이에게 감정을 자극하는 언어나 단어는 잔소리일 뿐이다. 엄마들은 직접적으로 편도체를 자극하는 도발적인 표현보다는 우회적인 표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