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기법의 계도기간이 지나면서 이에 따른 법적인 문제에 대하여 각 치과마다 직군 간의 업무분담을 나누었을 것이다. 이런 시점에서 이번 의기법을 원인론적인 면에서 생각해보고 다시 결과론적에서 생각을 뒤집어 보았다. 원인론적인 것은 이미 신문지상에서 보아 잘 알고 있는 상황이니 생략하기로 하고 결과론적인 면에서 유추해본다. 우선 의기법의 강요가 치과의사에게 미치는 영향을 생각해보면 치과위생사만을 고용한 원장에게는 업무의 증가가 없으니 무관하다. 위생사와 조무사를 고용한 원장은 업무 분담을 지시만하면 되니 별문제가 없다. 조무사만 고용한 원장에게는 두 가지의 선택이 있다. 본인이 직접 행하거나 위생사를 고용하는 것이다.그럼 여기에서 왜 조무사만 근무하는 치과인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이유는 간단하게 4가지로 정리된다. 첫째는 원장이 조무사라는 직업을 너무 좋아한다. 둘째는 위생사라는 직업을 너무 싫어한다. 셋째는 위생사를 구할 수가 없다. 넷째는 일시적으로 위생사가 없다. 이런 상황에서 의기법이 미치는 영향을 살펴보면 첫 번째와 두 번째 원장은 감정의 문제라서 상관이 없다. 세 번째의 원장은 어차피 위생사를 구할 방법이 없다. 네 번째 원장님은 빨리 고용을 서두
빠른 속도로 세상이 변하고 있다. 아니 빠르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진화하고 있는 느낌이다. 얼마 전 강연회에서 “인류는 지난 3000년 동안 인간 중심 사회였다면 이제부터는 사물중심의 사회로 변한다”는 말을 듣고 공감한 적 있다. 그리고 사물 중심 사회라는 관점에서 요즘 사건들을 해석해보니 이해하기가 쉬워졌다. 학문의 전당인 대학에서는 취직이 잘 안 되는 과는 폐과시키고 학과들을 취업을 기준으로 통폐합시키고 있다. 거기에 교육부장관은 한술 더 떠서 대학은 취업준비를 위한 곳이 되어야 한다고 피력했다. 요즘 취업하지 않은 대학생들에게 졸업을 연기하는 현상은 당연시되고 있다. 이미 대학이 학문의 전당이라는 말은 사라진지 오래되었다. 이런 학교의 움직임에 반대하는 철학과나 언어학과 교수들의 몸싸움이 간간히 TV화면에 잡히지만 도도하게 흐르는 역사적 흐름을 바꾸기에는 역부족이다. 사회에서는 간통죄가 위헌 결정이 났다. 사회 구성의 기본단위를 가정으로 잡았던 것에서 개인으로 바뀐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뉴스 사회면 기사를 보면 연인이나 동거했던 사람 간에 헤어지면서 살해사건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이 보인다. 극단적인 내용으로는 보험금을 타기 위하여 남편을 농약으로
우리나라는 지금 급격하게 고령화 사회로 진입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에 대하여 치과계 일각에서는 새로운 환자의 풀이 형성된다는 긍정적인 생각이 많다. 그런데 치과계나 우리사회는 아직 고령화 사회를 경험해보지 못하여 준비되어 있지 않다. 심리학에서는 노인심리나 사회의 고령화에 대하여 한 파트로 정하고 있는 반면에 아직 사회는 미비한 느낌이다. 이미 사회적으로 많은 문제점들이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얼마 전 아내의 치매를 10년 동안 돌보던 할아버지가 더 이상의 병수발을 포기하고 할머니를 죽이고 자신도 사망한 사건이 있었다. 그리고 이와 유사한 가슴 아픈 사건들이 빈번하게 발생한다는 뉴스를 자주 접한다. 결국 준비되어 있지 않는 사회에서 겪어야 하는 단계이다. 복지와 사회제도가 접근하여야하지만 아직 우리사회나 정치인들은 노령화보다는 육아 쪽에 더 많은 관심을 두고 있는 느낌이다. 치과에도 많은 변화가 예상된다. 일단 치과의사들의 은퇴 시기가 늦어진다. 예전이라면 60~65세 정도에 은퇴하였다면 지금은 70세까지도 현역 활동이 가능하다. 첫 번째 이유는 치과의사가 꾸준한 자기관리를 통하여 건강하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삶을 같이 동반해온 동료나 진료를 받아온 환자들도
구순구개열 환자에 대한 교정치료 및 수술에 대하여 의료보험을 적용해주는 것을 검토한다는 기사를 접하고 느낀 감정은 감사하다는 마음이었다. 일본에서는 대학병원에 공동치료센터가 있어서 구순구개열 환자뿐 만 아니라 다른 기형 환자들도 모든 과가 한군데 모여서 같이 진료를 한다. 즉 환자는 센터에만 가면 그곳에서 교정과, 보철과, 구강외과, 보존과 치료를 한꺼번에 다 치료받을 수 있다. 더불어 정부기관과 각 산부인과가 연계돼 있어 구순구개열 환자가 출산되면 산부인과에서 바로 센터로 연락하며, 센터에서는 보호자에게 연락하여 환자가 0세부터 프로그램에 의하여 치료를 받기 시작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형편은 센터는 고사하고 치료비도 모두 부모의 몫으로 되어있다. 또한 교정치료비 조차도 보험이 안 되는 형편이다. 게다가 역학조사에서 부모들이 경제적인 이유로 교정치료를 받지 못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또한 부모들은 자신의 아이가 구순구개열인 경우에 아이에 대한 죄책감을 지니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런 심리를 이용하여 일부 의사들은 이를 빌미로 비급여 진료부분에서 폭리를 취한다는 이야기마저 들리는 현실에서 구순구개열 환자에 대한 보험급여의 결정은 정말 감사한 일이 아
제목이 무슨 간첩 암호 같은 느낌을 주지만 우리 치과의사들에게 밀접한 숫자이고 많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725는 올해 치과의사 시험에 합격한 새내기 치과의사의 숫자이다. 751명이 응시하여 725명이 합격하였으니 96.5%의 합격률이다. 다른 숫자는 올해 전문의 치과시험을 합격한 선생의 숫자이다. 289명이 응시하여 285명이 합격하여 합격률이 98.6%이다. 그래서 새해 치과의사 합격자의 숫자와 전문의 합격자의 숫자를 비교하여보니 새로 면허를 받은 치과의사의 약 40%가 새로 합격한 치과전문의이다. 물론 원칙적으로 하자면 지금 전문의를 따는 선생님들이 배출되던 시기의 총인원으로 계산하는 것이 수학적으로 맞겠지만 사회학적으로 생각하면 올해 새로이 면허를 받는 치과의사 대비 새로 시작되는 전문의 수를 비교하여도 타당성은 있다. 결국 치과의사의 약 40%가 전문의가 되는 시대가 되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필자는 옳고 그름과 잘잘못을 따지려는 것이 아니다. 다면 시대가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보자는 것이다. 세월이라는 시간이 흐르면 시대라는 문화가 따라 흐르며 세상을 만든다. 아무리 옳고 그름을 따지고 막으려하여도 도도하게 흐르는 세상은 한 두 사람이나 집단의 의지
현대의 위대한 철학자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이라는 대표 저서에서 ‘두려움이 대상을 갖는 것이라면, 불안은 대상을 갖지 않는다’라고 말하였다. 두려움은 하이데거가 불안에 대비시키는 하나의 기분현상이었다. 두려움이 비본래적 정황성이라면, 불안은 본래적 정황성이라고 하였다. 그는 “두려움은 우리를 본래적 자기로부터 회피하게 하는 반면, 불안은 우리를 감춰졌던 본래적 자기 앞에 직면하게 한다. 그런데 두려움의 현상은 세 가지 구조계기를 갖는다. 두려움의 대상(무엇 앞에서), 두려워함 자체, 그리고 두려움의 이유(무엇 때문에)가 두려움을 통일적으로 구성한다. 공포와 두려움 그리고 불안 등의 기분이 ‘사람이 있음’으로부터 발원하고, 그 ‘있음의 뜻’이 시간의 빛 아래서만 제대로 밝혀질 수 있다면 기분 분석의 시도는 결국 ‘존재와 시간’의 문제에 맞닥뜨리게 된다”라고 정의하고 철학적 보편성을 획득하기 위해서 기분 분석을 하였다. 두려움은 하나의 감정이다. 감정은 사전적으로 어떤 현상이나 사건을 접했을 때 마음에서 일어나는 느낌이나 기분을 말한다. 감정에는 다양한 용어가 있다. 사전에 의하면 희로애락(喜怒哀樂)처럼 격렬하고 강하지만 폭발적으로 표현되어 오래 지속되지 않
요즘 청소년과 관련된 대형사건 두 가지가 필자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안산 의붓딸 살해사건’과 ‘김군 터키 실종사건’이다. 얼핏 생각하면 전혀 연관성이 없는 사건이다. 하지만 두 사건 모두 청소년이 개입되어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한 사건에서는 의붓아버지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살해된 16세의 소녀가 있었고 다른 한 사건은 스스로 삶을 개척하기 위하여 집을 떠난 18세의 소년이 있었다. 첫 번째 사건은 엄마가 이혼 후에 새로 선택한 의붓아버지가 아주 극악하여 성폭행을 당하다 급기야는 살해된 일이다. 아주 착하고 여린 아이여서 저항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두 번째 사건은 교우 관계 때문에 중학교를 그만둔 뒤 집에서 혼자 검정고시를 준비하다가 인터넷과 비밀 SNS로 대화하던 터키의 펜팔 친구를 따라 떠난 18세의 은둔형 아이였다. 이 두 사건을 보면서 필자가 슬픈 것은 순종하고 따랐던 착한 순종형 아이도, 스스로 선택하고 행동하였던 행동형 아이도 모두 이 사회의 피해자라는 것이다. 물론 극단적인 논리일 수는 있으나 어쩌면 지금 우리나라의 청소년들이 처한 또 다른 형태의 모습일 수도 있다. 청소년의 문제의 발단을 찾을 때에 제일 먼저 소속된 가정의 형태와 엄마를
어제 오전 은행에 들렀다. 바로 앞 손님이 70대 노인이셨는데 한동안 불만을 토로하셔서 뒤에서 상당한 시간을 기다리게 되었다. 그동안 본의 아니게 내용을 듣게 되었다. 핵심 내용은 은행카드의 포인트를 현금화시켜주지 않는 것에 있었다. 결국 노인은 화만 내고 돌아가셨다. 그 이후에 가습기를 보려고 전자상가를 갔더니 그 곳 데스크에서도 70대 노인의 큰 목소리가 들린다. 돌아다보니 휴대폰 결제 비용에 대한 내역으로 실랑이를 하고 있었고 필자가 상점을 나올 때까지도 해결되지 않고 있었다. 아침에 들른 두 장소 모두에서 노인들의 큰소리를 들으며 그날의 일진을 확인하니 기축일이었다. 동양철학적으로 설명하면 양측이 모두 옳은 날이다. 다만 내용상의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주장하는 쪽에서 내용을 잘 파악하지 못하는 날이란 의미를 지녔다. 노인은 잘못된 제도에 대한 지적, 상점들은 규정에 따른 행동이라는 차이로 해석된다. 노인은 정의를 실현하려는 외침이었고 상점 입장에서는 또 한명의 Black consumer(BC)였을 것이다.조선시대 정조 임금 시절에 정약용 선생이 실학을 주장하던 때에 독일에서는 가우스가 표준정규분포를 만들었다. 필자가 표준정규분포를 처음 공부한 것은
새해 벽두에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보니 장자(莊子)에 나오는 무용지용(無用之用)이란 문구가 떠오른다. ‘무용과에 간 지용이’란 의미로 인터넷 웹툰 만화도 있지만 실제의 의미는 그것과 사뭇 다르다. 사전적으로는 ‘쓸모없는 것도 쓸모가 있다’라는 의미이지만, 그 의미는 실로 다양하다. 장자에서는 “사람은 모두 유용(有用)의 용(用)만을 알고 무용(無用)의 용을 모른다”라고 하였다. 더불어 무용을 알아야 비로소 진정한 유용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한 사람이 길을 걸을 때 걷는 부분은 땅의 일부이다. 그래서 지면에서 발로 밟을 자리(유용)만을 남기고 그 밖의 부분(무용)을 모두 파내 버렸다면, 과연 사람은 보행을 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예를 들어 무용의 용을 설명하였다. 또 산의 나무를 예로 들었다. 잘생긴 나무가 빨리 잘려서 집짓는 용도나 가구의 용도로 사용되지만 못생긴 나무가 잘리지 않는다고 하였다. 결국 그로 인하여 오랜 세월이 지나면 비록 못생겼을 지라도 세월의 가치를 인정받는다. 즉 존재로서의 가치가 있음을 설명하였다.우리가 살고 있고 살아온 세계 속에는 모든 것이 유용에 맞춰져 있다. 모든 교육은 어떻게 유용해질까만을 생각해왔다. 그래서 쉬지 못하고 끊임
우리의 전통적인 새해인사는 늘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이지만 올해는 영어에서 말하는 ‘Happy New Year’와 같이 “행복한 한해가 되십시오”로 새해 첫 인사를 시작한다. 새해인사를 생각해보니 참 다양하다. “새해엔 좋은 일만 가득 하십시오”, “새해엔 바라는 일을 모두 이루시길 기원합니다”, “건강하시고 오래 오래 사십시오” 등등이 있다. 한자어로는 送舊迎新, 謹賀新年 등이 많이 사용된다. 10여년 전에는 모 카드사의 광고에서 “새해엔 부자되세요!”라는 문구가 인기를 얻은 바 있었다. 그 이후에는 “새해엔 대박나세요!”가 한 동안 많이 애용되었다. 새해인사도 시절에 따라서 변한다. 이에 필자는 올해의 인사를 “행복하십시오!”로 하였다. 두가 ‘복’ 중에서 특히 ‘행복’을 받기 원한다. ‘복’은 일반적으로 오복을 이야기한다. 오복을 서경(書經)에서는 (1) 수(壽) : 장수하는 것, (2) 부(富) : 물질적으로 넉넉하게 사는 것, (3) 강령(康寧) : 몸이 건강하고 마음이 편안한 것, (4) 유호덕(攸好德) : 도덕 지키기를 좋아하는 것, (5) 고종명(考終命) : 제 명대로 살다가 편히 죽는 것이라 하였다. 이것이 양반들의 오복이었다면 서민들의
이제 올해도 며칠 남지 않았다. 지난 한해를 돌아보니 기억나는 것은 기차로 시작하여 배를 지나 비행기로 끝나는 느낌이다. 철도노조의 파업으로 시작한 한해가, 아직 철들지 않은 아이들의 참변을 지나서, 철없는 어른의 추악한 만행으로 끝나간다. 그 사태들을 바라보는 이들의 마음 저변에는 안타까움과 분노가 같이 공존했다. 그런 일들이 비록 타인에게 발생하였지만 언제든지 우리에게 발생 가능한 일이고 매일매일 그런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더욱 체감 지수가 올라갔었다. 더불어 뉴스를 보면 수많은 사건사고들이 마치 한편의 막장드라마를 보는 듯하여 요즘은 어지간한 내용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그 와중에도 어려운 경제 상황이 더욱 모두를 힘들게 한다. 그렇게 한해를 힘들게 마음고생을 많이 하였다. 지나온 갑오년이 그런 해이다. 사실 한해를 돌아볼 때 한해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인근한 해를 같이 묶어서 생각한다. 즉 갑오년을 단독으로 생각하기보다는 임진년부터 시작하여 을미년까지 4년을 같은 흐름으로 보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일이 그러하듯이 단독적인 것이 아니라 기승전결을 지니고 시간이 흐르기 때문이다. 갑오년이 속한 시기의 기간을 과거 우리 역사 속에서 찾아보면 삼국시
매우 생소한 단어이다. 인터넷에 검색해보니 비싼 초콜릿 속에 들어있던 견과류의 일종이다. 그런 땅콩의 일종인 것이 인터넷 검색어 상위 랭킹에 올랐다. 일명 ‘땅콩리턴’이라고 불리는 사건 때문이다. 요즘 시쳇말로 ‘갑질’의 대명사인 ‘개밥교수’와 쌍벽을 이루는 대표 사건이 되었다.‘개밥교수’는 한 대학의 교수가 여행을 가면서 대학원생에게 자신의 개에게 밥을 챙겨 주라고 시킨 일이었다. ‘땅콩리턴’은 모 항공사 오너의 큰딸인 부사장이 비행기에서 이륙 전에 리턴시킨 사건이다. 자신이 땅콩을 주문했는데 그것을 접시에 주지 않고 봉지 채로 주었다고 그 승무원을 괘씸죄로 내리게 하게 위하여 비행기를 리턴시킨 것이 이유다. ‘라면상무’, ‘신문지회장’의 뒤를 잇는 사건이다.그런데 이번 ‘땅콩리턴’은 앞의 ‘갑질’과는 차이가 있다. 갑의 위치에 있는 자가 소리치고 화내고 하는 ‘갑질’이라는 면에서는 유사하다. 그러나 그 동안의 ‘갑질’에는 당하는 쪽인 을에 국한되어 발생하였다. 하지만 이번 ‘땅콩리턴’의 경우에는 비행기를 리턴시킴으로 비행기가 25분정도 지연되는 사태가 발생하였고 또 비행기 안에 탑승한 250명의 승객은 갑과 아무런 인과관계가 없었다. 즉 이해관계가 없는
Black or white는 유명한 골프웨어 브랜드의 짝퉁 같은 느낌이 들지만 오늘 필자가 이야기하려는 내용이다. 요즘 미국에서는 퍼커슨시 흑인 사살사건의 불기소 처분으로 눌려왔던 인종차별 문제가 다시 이슈화되고 있다. 그러던 중 오하이오주에서 장난감 총을 갖고 놀던 열두 살 흑인 소년이 사살된 사건이 발생하였다. 사건의 내용은 장난감 총을 갖고 놀던 아이를 지나가던 주민이 발견하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신고하였다. 그러나 신고를 받는 경찰의 질문은 “Black or white?”였다. 신고자는 “Black”이라고 답하였고 경찰차는 현장에 도착하여서 2초 만에 사살하였다. 경찰은 장난감 총인지 구별하기 어려웠다고 말하였다. 미국에서는 판매되는 장난감 총의 총구는 다른 색을 칠하여 진짜 총과 구별한다. 물론 어두워서 잘 안보였을 수도 있다. 이런 저런 이유와 사연들이 많은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이미 경찰이 신고자에게 “Black or White”를 묻는 순간 모든 것이 결정되었다고 생각한다. 경찰에게 중요한 것과 신고자의 중요성이 달랐다. 신고자는 장난감 총일 가능성을 설명하였지만 경찰은 “Black or white”만 물어보았다. Black이라고 듣는 순간
우연히 TV 노래 경연 프로그램에서 80년대 대학생처럼 수수하게 생긴 한 지원자의 노래를 듣다가 순간 감정의 흔들림을 느끼고 오랜만에 집중하여 노래를 들었다. 노래를 듣던 한 여성 심사위원이 눈물을 흘리는 장면도 보였다. 중저음의 목소리와 가사가 어울리며 감동을 주었다. 심사위원의 질문에 어머니가 쓴 글을 노래로 만들었다고 하였다. 방송이 끝나고도 여운이 남아 인터넷으로 반복하여 노래를 들어보았다. 아무리 원한다 해도 / 안 되는 게 몇 가지 있지 / 죽도록 기도해 봐도 / 들어지지 않는 게 있지 / 열심히 노력해 봐도 / 이뤄지지 않는 게 있지 / 아무리 원한다 해도 / 안되는 게 몇 가지 있지 / 그 중에 하나 떠난 내님 / 다시 돌아오는 것 / 아쉬움뿐인 청춘으로 / 다시 돌아가는 것 / 사랑하는 우리 엄마/다시 살아나는 것/그때처럼 행복하는 것 / 사랑하고 사랑받았던 / 그 시절은 지나갔지만 / 아마도 후회라는 건 / 아름다운 미련이어라 후회_곽진언 그런데 읽을 때마다 느낌이 다르다. 세상을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이 매일 매일 느끼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듣는 이들은 과거에 지나온 일들 중에 가장 아팠던 순간들을 떠올리게 한다. 법정스님의 무소유처럼 비
1년 전 일이다. 고등학교 학창 시절 친구의 아들이 주걱턱을 주소로 상담하러온 일이 있었다. 안면형태와 구강 내 소견을 보니 술전 교정이 필요한 상태였다. 그런 상황을 설명하였으나 친구의 아들은 필자에게 내원하기 전 이미 몇 군데의 성형외과에서 상담을 받은 상태였고 아빠의 요청에 마지못하여 필자의 병원에 온 것이었다. 그리고 이미 성형외과에서 선수술을 하려고 마음을 굳힌 상태였고 그 성형외과에서는 수술을 하면 교정치료는 무료로 해준다고 했다고 말하였다. 아무리 설득하고 이해를 시켜도 그가 가진 생각을 변화 시킬 수가 없었고 결국 친구아들을 그날 이후로 만나 본 적이 없다. 아마도 본인의 생각대로 성형외과에서 수술하고 교정치료를 받을 것으로 생각되어 필자 또한 친구에게 아들이야기를 묻지 않았다. 얼마 전 필자의 아들이 귀국을 하고 자신의 친구를 치료해달라고 하여 아들친구를 상담하고 교정치료를 시작하였다. 아들의 친구와 상담을 하면서 문득 1년 전에 상담하였던 친구아들이 생각이 났다. 아들의 친구는 필자의 말을 경청하려고 하던 반면에 친구아들은 상당히 배타적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같은 나이 또래인데 왜 이런 많은 차이가 발생하는 지가 궁금하였다. 필자에게 그들